회화 예술
17세기 네덜란드
한 화가가 그림을 그렸다
근데 이 그림은 화가의 인지도가 낮아서
값어치를 높히기 위해 일부러 다른 사람의 이름도 새겨졌었던 그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히틀러 손도 거쳤던 이 작품은 바로
회화 예술 (Art of Painting)
*1664 ~ 1668년 (추정)
이 그림을 그렸던 화가는 요하네르 베르메르는
* 네덜란드 화가 (1632 ~ 1675)
신혼집도 못 구할정도로 흙수저 of 흙수저였는데
슬하에 자식만 11명이었던 정력가였다..ㅗㅜㅑ
*그러나 의외로 그의 작품속에서는 자식들을 찾아볼 수 없었음!
베르메르가 평생 흙수저로 살았던 이유는
당시 네덜란드가 예술의 황금기를 맞이한 때라
화가 풍년이어서 경쟁이 심해 그림 값이 많이 낮았었다
하지만 그림 값이 낮아지면서 그림에 눈독들이는 사람들이 생겼는데
바로 먹고는 살만했던 은/동수저 중산층들!
"님 그림 그려주셈!"
"넹!"
중산층들은 부자들이 소유했던 성경이나 신화를 표현한 그림보다는
자신들의 소소한 일상을 그려주길 바랐다
그럼에도 여전히 경쟁은 치열했고
이 바닥에서 살아남기 위해선 자신만의 특색이 있어야했다
불행 중 다행으로 베르메르는 당시 실내 묘사를 꽤나 잘했던 화가여서
주로 일에 몰두하는 여성을 주로 그렸고
입에 풀칠을 할 정도는 벌었었다
*물론 11명의 자식들을 다 먹여 살리기엔 부족했음
*우유를 따르는 하녀
*저울을 든 여자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
그러던 중 1663년 여름
프랑스에서 한 외교관이 그림을 사러 작업실에 찾아왔다
"누구세영?"
"저 그림 좀 보려고..."
"아 지금 보여줄 그림이 없는데; 대신 최근에 팔았던 그림 보여드림!"
최근에 그림을 사갔던 빵집에 데려가 그림을 보여줬지만
외교관은 크게 감흥받지 못하고 발걸음을 돌렸다
"님 그림 별로네요..그냥 감 ㅅㄱ"
"아; 개빡;"
그렇게 퇴짜맞은 베르메르는 빡쳐서 그림을 그리게 되는데
그때 그리기 시작한 그림이 바로
회화예술이었다!
두둥!!
이 작품은 후에 다른 사람이 리메이크할 정도로 유명했는데
베르메르는 아마 자기과시를 위해 보여줄 명목으로 이 그림을 그렸던 걸로 추정된다
그 근거로 회화 예술의 크기는 다른 작품보다 월등히 컸고
베르메르는 죽을 때까지 이 그림을 절대 팔지 않았다
진주 귀고리를 한 소녀와
저울을 든 여인은 17 인치 X 15 인치
빨간모자를 쓴 소녀는 9.5 인치 X 7 인치
회화예술은 무려 47 인치 X 39 인치였다
당시 네덜란드 화가들은
자연 그대로의 빛, 그림자, 색을 표현하는데에 중점을 뒀는데
회화예술은 그 표현력이 어마어마했다
예를 들면 햇살이 들어오는 효과
두둥!
혹은 질감의 표현 등등...
둥!!
*이때 그렸지만 완성은 몇 년 뒤에 함
베르메르는 회화 예술을 그리는 동안 다른 작품도 그렸는데
후에 분석결과 이 작품은 다른 작품들과 달리
뭔가 차별화된 게 있었다
샹들리에, 커튼, 테이블과 의자같은 디테일이
벽보다 먼저 그려진걸 확인할 수가 있었는데
그 말인즉 이미 작품의 모든 구도를 생각해놓고 그렸다는 걸 의미한다!!
*보통 그림을 그릴때는 공간을 먼저 그린 뒤 디테일을 그림
와 저 큰 걸 그리기 전에 다 생각해놨다니;
실제로 베르메르의 다른 작품에선 덧그리거나 지운 흔적이 보였는데
예를 들어 열린 창에서 편지를 읽는 소녀는
이런 큐피드를 그렸다 지운 흔적이 있었고
잠자는 소녀에서는
문에 원래 강아지가 그려져있다가 지워진 흔적이 있었다
하지만 회화예술은 훨씬 더 복잡한 구도임에도 불구하고
수정한 흔적이 하나도 없었다
아니 어떻게 이럴수가 있지!?!
이러한 사실 외에도 회화 예술이 주목을 받게된 이유는
뒤에 있는 화가는 또렷하게, 앞에 있는 사물은 흐릿하게 보이게 그린게 마치
카메라로 포커스를 잡았을 때 나타나는 현상과 동일했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 때가 카메라가 나오기 200년 전이었다는 사실!
*포커스 잡힌 선명한 부분
*포커스가 안 잡힌 흐릿한 부분
*고화질로 봐야 좀 느껴지는 듯?
아니 어떻게 이럴수가 있지!?!
궁금했던 닝겐들은 연구하기 시작했고
그 결과 하나의 가능성을 제기했다
그것은 바로 카메라 옵스큐라!!
두둥!!
이미 1620년대부터 네덜란드 화가들이 사용했었던 도구인데
전면 렌즈를 통해 빛이 들어오면
안에 있는 유리에 반사되고
위에서 사물을 볼 수 있게 해주는 기기였다
헐 저런게 있었다니!!!
만약 베르메르가 이걸 사용해서 그렸다면
회화 예술은 실제 장면을 축소해서 그렸다는 말이 된다!
"그래서 내가 나서겠다!!"
80년대부터 알아내고자 연구했던 한 대학교수 필립 스테드만
"일해라 노예들아!!!"
그는 베르메르의 다른 작품과 대학원생들을 이용해서
1/6 크기로 축소된 모델을 만들었는데
그 결과 어느 위치에서 카메라 옵스큐라로 봤는지 알아낼 수 있었고
두둥!!!
완벽하게 재현해냈다
하지만 다른 의견을 내보인 사람들도 있었다
*주로 박물관 사서들
"아니다!!! 이 그림은 실제 장면이 아닌 상상 속의 장면이다!!!"
왜냐하면 여자가 마치 상상 속의 인물처럼 너무나도 아름다웠고
당시 네덜란드에 이런 대리석 바닥은없었다는 점!
설령있었다고 하더라도 가격이 비싸서
베르메르같은 흙수저는 쳐다도 볼 수 없었을 것이다!!
*베르메르는 죽을 때까지 흙수저였음
"거기다가 화가와 모델의 비율도 말이 안된다! 화가의 앉은키랑 여자의 선 키랑 비슷하다는게 말이되냐!!"
두둥!!!
서있는 여자와 앉아있는 화가의 키가 비슷해 기괴했다
"그리고 봐라! 이 자국을!"
두둥!!
캔버스 표면에 남아있는 핀자국이었다
*여기가 핀 자국 위치인데 원본에서는 잘 보인다고 함
그리고 여기에 줄을 매단 핀을 꽂으면!!
근데 핀 위치 조금 어긋난거 같음;
두둥!!
대리석 바닥 배열과 정확히 일치하는 모습이었다
베르메르는 실에 분칠을 하고
그 다음에 팅!하고 튕기면
남는 저 가루를 이용해서 원근감있게 그렸을 것이다!!
"그럴수가!!"
"그리고 결정적으로 저 여자는 신화 속에 등장하는 인물이다!!"
세자르 리파의 "화상" 이라는 17세기에 발간된 책에는
역사 인물에 대한 정보들이 나열되어있다
거기에 보면 역사의 여신을 묘사한 문장이 있는데
"역사의 여신 클리오는 월계수관을 쓰고 트럼펫, 책을 들고 있다"
두둥!!
그래서 누가 맞는거야?
정확한건 본인만 알겠지 모...
*워낙 알려진게 없어서 확신은 없지만 후자가 그나마 최신 결과 중 하나임
논문봐도 딱히 없음; 근데 실제 장면은 아닌거 같긴 함
1675년 베르메르가 사망하고
그의 유산을 정리한 자료에 의하면 베르메르가 남긴 것은
잡동사니를 비롯한 상당수의 빚 뿐이었고
그의 작품이었던 회화 예술에 대한 언급은 어디에도 없었다
이유는 바로 베르메르의 아내인 카타리나가
빚쟁이들 모르게 그림을 미리 빼돌렸던 것!!
하지만 결국 얼마 안 가서 걸리고 말았고
회화 예술은 강제로 경매에 붙여졌으나
얼마에, 또 누구에게 팔렸는지에 대한 정보는 어디에도 남아있지 않았다
그렇게 베르메르가 누구에게 팔지도 않았을만큼 아꼈던 작품은
행방도 모른채 사라지고 말았다
그리고 140여 년후 다시 세상에 등장했는데
다른 사람의 이름이 새겨진 채 거래가 되는 중이었다
그것도 생전에 자기의 라이벌이었던 피터 드 후치의 이름이 말이다!!
"닉세탁 개꿀!"
*피터 드 후치 (1629 ~ 1684), 생전 베르메르랑 비슷한 그림을 그렸던 라이벌
당시 회화 예술의 소유자는 요한 루돌프 체닌으로
1813년 한 마구 제작자에게서 아주 싼 값에 샀다고한다
19세기 초까지만해도 베르메르는 듣보잡이었고
그가 주목을 받게된 때는 바로 19세기 중반 사진이 유행하던 때!
"오 저 그림 봐. 사진이랑 비슷한 느낌 듦!"
"ㄹㅇㅋㅋ"
그렇게 회화 예술은 주목을 받기 시작했고
20세기에 들어서면서 엄청난 네임드가 되었다
1930년대 체닌 가의 야로미르 체닌에게 소유권이 넘어갔고
그는 그림을 팔아서 유흥비를 마련하려고 했으나
"아 놀고싶은데 돈이 없네 이거 팔까?"
*야로미르 체닌 (1908 ~ 1966), 요한 루돌프 체닌의 6대 자손
"ㄴㄴ 님 그거 거래 안됨 ㅅㄱ"
작품이 네임드가 된 탓에 아예 정부에서
회화 예술의 거래 자체를 금지시켜버렸다
그렇게 평화를 찾을 줄 알았던 회화 예술은
곧 이어 다른 사람의 눈에 들어오게 되는데
바로 히틀러였다!
"아 저거 갖고싶은데..일단 참아야겠다"
"야로미르! 저 그림 나한테 팔아라"
"오 놀고 먹을 돈도 없었는데 잘됐다!"
오스트리아와 합병한 뒤
히틀러는 회화 예술을 눈독을 들이는데에 그쳤지만
그의 오른팔이었던 헤르만 괴링은
아예 야로미르로부터 185만 마르크에 작품을 매매했다
"저기 히틀러님; 저거 우리 문화유산이라서 빈에다 계속 냅두면 안될까요?"
"ㅇㅇ 그렇게 함"
하지만 오스트리아 측에서 정식으로 항의했고
히틀러는 거래를 무효처리하고 작품을 빈에 남겨두기로 결정했다
"야 괴링 너 그거 구입한거 무효니까 도로 갖다놔"
"왜요?"
"왜냐니?"
"내가 먹을거니까 ㅋ"
'아 총통이라고 지 좆대로 하네;'
'아;'
그러나 정작 자신이 165만 마르크로 구입함으로서
오스트리아와 괴링의 뒤통수를 씨게 후려쳤다
"야 이거 '거기'에다가 잘 숨겨둬라"
"넹"
괴링과 오스트리아를 뒤통수치고 그림을 구입한 히틀러는
자신이 모아둔 걸작 예술품들을 모아둔 뮌헨에 있는 지하창고로 옮겼다
히틀러가 이 작품을 얼마나 아꼈냐하면
자신의 고향 린츠에 거대한 미술관을 짓는다는 예술 계획을 발표한 잡지에
이 회화예술을 커버로 사용할 정도였다
하지만 얼마 안 가서 뮌헨에 대거 폭격이 시작됐고
지하창고에 숨겨둔 작품들은 소금 광산으로 옮겨졌다
전쟁이 끝나고 레인 페이슨 교수에 의해 발견되기 전까지 소금 광산에 은닉되었다
회화 예술은 다른 몇몇 걸작품과 함께
광산 안에 있는 또 다른 특별한 방에 숨겨졌었다고 한다
다행히도 보존은 거의 완벽에 가까웠고
발견된 후 회화 예술은 오스트리아에 반환되었다
현재는 오스트리아에 있는 빈 미술사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고
박물관 사이트 메인 화면에 당당히 걸려있다!
끝!!!